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2회 차, ktx 기다리며 서울역 광장에서

금요일 오후, 친구와 함께 대전에 내려가기로 했다. 대전에서 학교다니는 친구를 보기 위해서였다.

무궁화호를 타고 내려가려 했는데, 표가 매진됐다. 입석도 있으니까 표를 미리 구해두지 않았는데, 코로나로 인해 입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궁화호는 전시간대 매진이라, 어쩔 수 없이 ktx를 타게 됐다. 가장 빠른 기차도 출발까지 시간이 남았다.

친구와 서울역 광장 계단에 걸터 앉았다. 나중에 여성 두 분이 옆에 앉았다. 우리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잠시 후, 여성 한 분이 더 왔다. 허리선이 가슴 아래 있는 흰색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었고,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스크도 같은 흰색이었다. 헤어는 패럴렐 단발로, 목 중간 정도 내려오는 머리길이였다. 피부는 하얬고, 쌍꺼풀은 얇고 길게 눈을 꾸몄다. 전체적으로 단아하지만, 클래식한 분위기였다.

친구가 담배를 피우자고 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할 일도 없고 따라갔다.

"...다시 올라갔을 때, 여성분 아직 계시면 말 걸어본다."
"누구 말이야?"
"흰색 원피스 입고 계시던 분."

친구는 그저 웃기만 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그녀가 떠났길 바랐지만 내 바람은 거절당했다.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지켜봤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다. 친구는 그냥 가자고 했다. 솔깃했지만, 저기 앉아있는 그녀가 보였다.

"편의점 가서 커피라도 사올까?"
"커피 마시게?"
"아니, 갖고 가서 말 걸어보게."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니 친구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별로였다.

"자, 가서 전화번호 물어보고 되든 안 되든 직진해서 기차타러 가는 거다."

친구의 의견이 굉장히 맘에 들었다.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처음 당당히 내딛었던 발걸음은 끝에는 기다시피 했다.

"기차 시간 기다리시는 거예요?"

옹기종기 앉아있는 세 분을 차례로 눈을 맞추고, 끝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 기다리시는 건 아니죠?"
"아니예요, 그냥 앉아있었어요."
"아, 언제 한번 커피 괜찮으실까요?"

무의식적으로 말이 나왔다. 아마 뒤에 보였던 스타벅스 로고 때문인 듯 했다.

"제가 7시 37분 기차긴 한데, 지금도 괜찮으시면 사드리고 싶어요."
"...저희 다요?"

그녀가 옆에 있는 친구들을 살폈다.

"친구분들도 같이 가죠, 사드릴게요."

진짜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녀의 친구들은 고개를 저었다. 둘이만 가라고 손짓했는데, 훌륭한 인품을 갖췄음이 분명했다.

어떻게 얘기가 돼서 같이 스타벅스로 걸어가며, 난 다시 뇌정지 상태에 빠졌다.

애초에 계획은 전화번호를 받든 못 받든 기차를 타러가는 거였는데, 원래 계획과 상당히 틀어졌다. 주절주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녀와 얘기하며 한 아쉬운 실수 몇 개를 기억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떤 거 드실래요?"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그녀는 부담주지 않으려고 그렇게 말했겠지만, 그게 제일 큰 부담이었다.

밤 새울 때나 마시는 거, 이게 커피가 나에게 가지는 의미였다.

이제까지 내가 먼저 카페 가자고 한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어떤 메뉴를 시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물쩍거리고 있으니 그녀가 주문했고, 나도 같은 음료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서로 알아갈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

위기는 기회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기회조차 위기가 된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 뼈저리게 알게 됐다. 나는 쓸데없는 말이나 하다 섣불리 번호를 물었다.

.
.
.
.
.

"...부담스러워요."
"......"

까이더라도 좀 천천히 물어보지, 커피가 나오는데 한참 걸렸고, 그 뻘쭘한 시간을 견디는 게 참 힘들었다.

"이름이... 아니다. 아니예요."

이름을 물어보려다, 전화번호보다 개인적인 것 같아서 그만뒀다. 커피를 받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물었다.

"전화번호는 여전히 비밀번호일까요?"
"네."

4자리 비밀번호도 1만 개의 경우의 수를 가진다. 내 경우엔 8자리 비밀번호였다.

커피는 씁쓸했다.

그녀는 스물 셋으로, 외국어대학교 학생이었다. 스타일도 좋고, 얼굴도 예쁜, 명문대 학생...

2회 차인 나에게 너무 벅찬 상대였다.


오답노트

{번호를 드리자}
여자 입장에서는 모르는 남에게 번호를 준다는 게 꺼려질 수 있다. 차라리 내 번호를 줘버리자. 어쩌면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까. -이건 아직 안 해봐서, 나중에 시도해보고 수정하겠습니다.

{스타벅스 메뉴 파악}
여자들이 좋아하는 음료가 뭔지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겠다.

{대학을 가자...}
어쩌다 보니 대학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대학을 안 가서 할 말이 없었다. 편입 공부 중인데,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겠다.

2021.09.03.